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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music

기억의 궁전

소설 <양들의 침묵>은 훌륭했다. 센세이셔널하면서도 시대를 초월한 우아함이 있었다. 난 이 소설을 바탕으로 한 영화를 통해 앤소니 홉킨스의 팬이 되었으며 (최고의 명작 <엘리펀트맨>은 그 이후 보았다) 조디 포스터가 연기한 클라리스 스탈링은 모든 면에서 감정 이입할 수 있는 아름다운 캐릭터였다.
몇 년 전, 가스파르 울리엘 사진으로 표지가 만들어진 <한니발 라이징>이 나왔다. 구입시 예전 <양들의 침묵> 소설까지 추가로 준다고 하기에 신나는 마음에 냉큼 사와 잔뜩 기대하며 봤다. 봤다. 보고 나서 표지를 보고, 또 표지를 봤던 기억이 난다. 작가 이름이...? 토머스 해리스가 쓴 게 맞나 여러번 확인했다. 이건 거의 <패왕별희>를 찍은 첸 카이거가 십 몇 년 후 <무극>을 찍은 충격에 맞먹었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영화에서도 봐줄 건 배우들 얼굴 뿐이었다.

하여튼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 얊팍한 소설에서 기억에 남는 유일한 부분이 있다. 소설의 시작에 나오고, 중간에도 잠깐씩 언급되는 한니발 렉터의 기억의 궁전이다. 



한니발 렉터 박사의 기억의 궁전으로 이어지는 입구는 그의 정신세계 한복판에서도 가장 깊숙하고 어두운 곳에 있다. 손짓 하나로 간단히 찾을 수 있는 빗장을 밀어 올리고 그 기이하고 섬세한 문을 열면, 거대하고 밝은 초기 바로크 양식으로 꾸며진 공간이 나타난다. 그곳은 수많은 방과 복도로 이루어져 있으며, 규모 면에서 이스탄불의 토카피 궁전과 견줄 정도로 거대하다.
궁전은 훌륭한 조명 아레 아름답게 배치된 예술품들의 향연장이다. 각각의 물건에는 그의 기억이 입력되어 있고, 그 기억들은 셀 수 없는 방과 복도를 따라 다른 기억으로 이어진다.  
(중략) 궁전은 한니발이 아직 어린 학생에 지나지 않았던 무렵부터 일찍이 지어졌다. 감옥에 감금되어 있는 동안 그는 계속해서 궁전을 고치고 넓혔으며, 그 안의 풍부하고 값진 재물은 간수들이 책 반입을 거부했던 기나긴 고통의 시간 내내 그를 지탱할 수 있도록 도왔다. 



"한니발, 모든 걸 머리 속에 기억하고 싶니?"
"그렇다면 네게는 마음의 궁전이 필요할 게다. 기억을 저장할 마음의 궁전 말이야."
"그리고 궁전은 아주 아름다워질 거야." 


 
한니발은 주변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거나 잠시 쉴 공간이 필요하면 기억의 궁전에 들어가면 되었다. 어느 방에 들어가 그 곳의 음악과 미술작품을 감상하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기억의 궁전에서 한니발은 얼마든지 오래 머무룰 수 있다고 했다. 그게 한니발의 기이하지만 강력한 정신을 지탱해주는 방법 중 하나인데- 탁월하지 않은가! 물론 일반인인 나는 기억력 부재로 성은 커녕 오두막도 짓지 못 하겠지만.
좋아하고 아름답고 가치 있는 것을 머리 속에 잔뜩 집어넣은 다음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처했을 때 그 기억을 떠올려 견딜 수 있다면!

오늘 취객 가득한 지하철에서 내내 생각한 것이다.
기억의 오두막이라도 설계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