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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music

어인 운명이,  제가 바라는 대로 살지 못하고, 살라고  주어지는 것을 살아야 하는지요. 여인이라 그러한가,  남들도 나 같은가.만들고 고치고 소망하는 것이 모두 다 홀로 달을 바라봄과 같으니 손발이 있으면 무엇하고, 뜻이 있으면 무엇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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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 오류골 작은집의 사립문을 지나면서도, 일부러 살구나무 쪽으로는 눈길도 돌리지 않았던  것이었는데. 그때 무너지게 검푸른 살구나무의  녹음이 강모의 얼굴에  푸른 그늘을 드리워  주었으나, 강모는 그냥 지나쳐 버리고 말았었다. ...

네가  없는데, 이제 나를 무엇에다 쓰겠느냐... . 

접시꽃 촉규화, 붉은  작약, 흰 작약, 황적색  꽃잎에 자흑점이 뿌려진 원추리들.

그 현란한 꽃밭 그늘에  꽈리가 몇 그루 모여서 있는 것이  눈에 띈다. 그것들은 등롱 같은 열매를 조롱조롱  푸르게 달고 있다.

지금은 그 꽈리  초롱에 물이 돌아 초록으로  열려 있지만, 저것은 가을이  되면 익으면서 주홍으로 투명해진다. 

그것이 영락없이 등롱의 모양이어서 이름도 등롱초라고 불리던가.


<최명희, 혼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