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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 언니를 사랑했다


기억이 퇴색하기 전에 글을 쓴다.
1978년에 태어난 이종 사촌 언니는 우리 엄마의 첫 조카이고 7녀 1남의 장녀인 큰 이모의 첫째 딸이었다.

어릴 때부터 영특했던 언니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많은 이모들과 외삼촌의 사랑을 받았다. 엄마는 탁구공을 언니의 눈 앞에서 떨어트렸다 받았다 하며 아직 아기인 언니를 즐겁게 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탁구공이 실수로 언니 얼굴에 떨어져 발그레하게 부었고, 풀이 죽어 큰이모에게 고백하니 눈을 곱게 흘기셨단다.
아장아장 걷게 된 언니가 큰이모와 손을 잡고 세수하러 걸어가는 모습을 보며 엄마도 결혼해서 저렇게 예쁜 딸을 낳아야지 라고 생각했었다고, 그 이야기를 내게 여러번 했었다.

언니는 나와 같은 고등학교를 졸업했고, 공부를 잘 했던 언니는 졸업 후 우리 아버지의 모교에 입학했다. 아빠는 처조카임에도 매우 기뻐했으며, 언니를 불러 이런 저런 얘기를 해주셨다.

언니는 2007년 겨울에 착하고 성실한, 어디 하나 나무랄 데 없는 형부와 결혼했다. 마치 거짓말처럼 좋은 시부모님과 시누이, 시동생이 곁에 있었다.

언니는, 약하게 타고난 몸 빼고는 모든 면에서 축복 받고 사랑 받는 사람이었다.

2009년 1월 3일 저녁 언니는 내내 앓고 있어 쇠약해진 몸이었다. 식사 후 몇 번의 구토가 있었고 부랴부랴 달려온 이모의 품 안에서 갑자기, 나비가 훌쩍 날아가듯 숨을 거두었다.
모든 것은 순식간에 일어났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 했다.

1월 4일 오전에 우리에게도 연락이 왔고 엄마가 대성통곡하는 모습을 처음으로 보았다. 
영동 세브란스 병원 장례식장으로 가니 결혼식 이후로 제대로 보지도 못 한 언니는 예쁜 사진으로 우리를 맞이했다. 이제 막 33살이 된 젊디 젊은 형부가 실신하는 모습을 몇번이나 보았고 자식을 먼저 보낸 큰 이모와 큰 이모부 얼굴은 차마 보지도 못 했다. 나와 동갑인, 언니의 막내동생인 사촌이 의젓하게 자리를 지켰다.

이모들은 모두 모여 믿지 못 해 울었고 나는 언니의 이름이 고인에 있고 상주에 형부 한 명 달랑 있는 걸 보고 울었다.

큰 이모네 가족보다 더 우는 건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숨을 쉴 때마다 눈물이 나왔다.

1월 5일 오전 발인했다.
형부는 계속 오열했다. 
엄마와 이모들은 계속 기도했다.
언니는 유골함에 담긴 채 능인선원에 안치되었다.

나는 외가 식구 중 언니와 가장 나이 차이가 나지 않는 여자 사촌이다. 그래서 언니가 입관하기 전, 평온히 잠든 듯한 모습도 보고 그 언니를 보며 끝없이 입맞추던 형부와, 곧 따라가겠다며 울던 이모부를 보았다.
"엄마가 너를 사랑한 것 알제?"
"우리는 모두 너를 사랑했다."

어린 사촌들은 훌쩍 훌쩍 울다가 자다 깨다 했다. 모두 다 큰 이모 댁에 모여 아무 일 없었든 듯이 왁자지껄하게 놀다가 눈물 섞인 한숨을 마지막으로 헤어졌다. 큰 이모는 바로 우리 집 옆동에 살고 언니와 형부의 집은 여기서 고작 20분 정도 거리였다. 이제 언니는 이모와 우리 집에서 더 가까운 곳에 있고 이번주 금요일에 첫번째 제사를 지낸다.

기막힌, 순식간의 죽음이었지만 언니의 시부모님은 정말 훌륭한 분이다. 그런 분들께 깊이 사랑받았던 언니다. 우리는 모두 언니를 사랑했다. 또 언니는 그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었다.

나는 잊을 지도 모르겠다 언니를.
하지만 이모들과 큰 이모는 새해마다, 언니의 생일마다, 결혼기념일마다 울게 될 것이다.
이것은 남겨진 자의 고통. 떠난 언니는 부디 행복하고 극락왕생하소서. 우리 모두 언니를 사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