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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

나쁜 피 Mauvais sang (1986)




아주 어릴 때, 미숙하고 무식할 때라도 영화나 책은 가리지 않고 닥치는 데로 보는 게 정답이다. 그리고 어떤 작품은 기묘하게도, 설명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으면서 그 자체로 가슴에 박히는 경우가 있다. 어릴 때 봤던 <나쁜 피>에서 내가 느끼고 얻은 건 무엇인가? 텍스트로 옮길 수 있는 것은 드니 라방의 드라마틱한 얼굴, 줄리엣 비노쉬의 눈, 하늘을 향해 날아오를 듯 뛰어가던 줄리엣 그리고 항상 스산한 새벽 같았던 배경이다. 인물 사이의 관계는 유추조차 할 수 없었고, 감독과 배우들 이름도 몰랐으며 지금도 스토리는 기억이 안 난다.

그러나 정말 좋은 영화는, 컨텐츠는 다른 의미로 사람들에게 다가온다. 말랑 말랑 유치한 <아멜리에>를 보면 "이건 내 영화인 거야" 라고 말하게 되듯이, <콜레트럴>에 나오는 흰 머리의 지친 탐 크루즈에 무조건적인 감정 이입을 하듯.

다시 생각해 보면 남들에게는 하등의 가치도 없는 쓰레기 컨텐츠란 없는 것이다. 그렇게 단정짓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그래서 나는 귀여니 책도 함부로 말 못 하겠다. 사춘기도 오지 않은 어린 아이가 <나쁜 피>를 보고 느낀 감정도 진짜였고, 다른 사람 역시 마찬가지일 수 있으니까.

잘난 척 하지만 사실 하나도 발전하지 않은 지금, 맥락 없이 무조건적으로 다가올 컨텐츠를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