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전에 잠깐 읽고 자려고 책을 폈는데 그대로 독파했다. 이게 1928년에 나온 작품이라고? 이런 표현이 책의 감동을 희석시킬까봐 쓰기 그렇지만 지극히 세련되어서 1990년대에 나왔다고 해도 믿을 수 있는 구성이다. 문장은 번역본임에도 고상하다.
역시 나 보자고 옮겨두는 문장 몇 개.
숀턴 와일더 <산 루이스 레이의 다리> 김영선 옮김, 샘터.
제 2부 몬테마요르 후작 부인
세상에는 문명사에 정해진 출현 시점보다 몇 세기 앞선 사상과 사랑에 빠졌다는 이유로 자신들의 삶이 침식당하는 것을 고수하며 사는 사람들이 있다.
- 66쪽
후작 부인은 가마를 타고 산 루이스 레이의 다리를 건너고 산을 넘어 큼지막한 허리띠를 두룬 여자들이 사는 도시로 향했다. 고요하고, 천천히 움직이고, 천천히 웃는 도시. 수많은 분수에 물을 공급하는 샘물처럼 차갑고 수정처럼 맑은 공기의 도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말다툼을 벌이도록 음을 맞춘 은은한 음악 같은 소리를 내는 종들의 도시. 쿨룩삼부쿠아에서 딱 하나 실망스러운 점이 있다면, 영원히 제자리를 지킬 것 같은 안데스 산맥의 위용과 골목길 구석구석에서 느껴지는 조용한 기쁨 같은 날씨 때문에 슬픔이 승화되고 만다는 점이다.
- 75쪽
마리아 부인은 초를 들고 옆방으로 가서 자고 있는 페피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축축하게 젖은 머리카락을 소녀의 얼굴 뒤로 쓸어주었다. 그리고 이렇게 속삭였다.
"이제부터 나도 살 거야. 다시 시작할 거야."
- 86쪽
제 3부 에스테반
이것이 에스테반에게서 사람들이 얻을 수 있는 최대치였다. 까만 후드와 마스크, 환한 대낮에 켜진 촛불, 잔뜩 쌓인 해골들, 무서운 찬송가 등과 함께 무시무시한 행렬이 시내를 통과했다. 에스테반은 나란히 그 행렬을 뒤따르며 먼빛으로 행렬을 힐끔힐끔 보았다. 마치 야만인처럼.
- 119쪽
쌍둥이 형제는 늘 알바라도 선장을 매우 존경했다. 그들은 짧은 기간 동안 선장 밑에서 일을 한 적도 있었는데, 세 사람의 침묵은 자기 자랑과 자기 변명과 미사여구가 판치는 세계 속에 있는 작은 씨앗 크기의 분별력이 움트는 것 같은 느낌을 자아냈다.
- 123쪽
에스테반은 울부짖었다. 선장은 일어서서 에스테반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큼지막하고 꾸밈없는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지고 잿빛으로 변했다. 그는 자신의 과거를 떠올리고 있었다. 선장은 바다에 관한 이야기를 빼면 세상에서 가장말을 서툴게 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때로는 진부한 말을 하는 고도의 용기가 필요한 경우도 있는 법이다. (중략)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해야 해. 에스테반, 있는 힘껏 앞으로 나가는 거야.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그래. 시간은 계속 흘러. 시간이 얼마나 빨리 흘러가는지, 너는 깜짝 놀랄 거야."
- 132쪽
제 4부 피오 아저씨
우리는 우수함에 대한 놀라운 기준을 알고 있는 세상에서 와서, 우리가 다시는 누리지 못할 미에 대한 어렴풋한 기억만 가지고 살다가 다시 그 세계로 돌아간다.
- 155쪽
제 5부 신의 의도일까?
(전략) "여기에는 멋진 정원이 있어요. 멋지지 않나요? 종종 우리를 보러 들리세요. 언젠가 후아나 수녀를 만나게 될 거예요. 우리 정원 책임자예요. 수녀원에 들어오기 전에는 정원을 구경도 못한 사람이에요. 높은 산에 있는 탄광에서 일했거든요. 지금은 모든 것이 그녀의 손길 아래 자라지요. 일 년이 지나갔어요, 부인. 우리의 사고가 난지. 나는 우리 고아원 아이였던 두 사람을 잃었어요. 하지만 당신은 친자식을 잃었지요?"
"네, 수녀님."
"그리고 절친한 친구도?"
"네, 수녀님."
"나한테 다 말해봐요."
그리고 카밀라의 오랜 절망이, 소녀 때부터 이어져온 외롭고 집요한 절망의 물결 전체가 후아나 수녀의 분수와 장미 사이에서 그리고 늙고 다정한 무릎 위에서 드디어 평안을 찾았다.
- 206~207쪽
"심지어 지금도, 나를 빼고 나면 에스테반과 페피타를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카밀라 홀로 그녀의 피오 아저씨와 그녀의 아들을 기억한다. 그리고 이 여인 홀로 자신의 어머니를 기억한다. 그러나 곧 우리는 죽게 될 것이고, 그 다섯 사람에 대한 모든 기억은 지상에서 사라질 것이다. 우리 자신도 한동안 사랑을 받다가 잊힐 것이다. 그러나 그 정도 사랑이면 충분하다. 사랑을 하고 싶은 모든 충동은 그런 충동을 만들어낸 사랑에게 돌아간다. 살아 있는 사람들을 위한 땅이 있고 죽은 사람들을 위한 땅이 있으며, 그 둘을 연결하는 유일한 다리가 바로 사랑이다. 유일한 생존자이자 유일한 의미인 사랑!"
- 212쪽.
침대 위에서 주책 맞게 조금 훌쩍거리기도 한 걸 보니 책의 고상함과는 상관 없이 또 확대 해석하고 대책 없이 노곤노곤 녹아내리는 내가 보인다. 안 변한 것 같아서 부끄럽기도 하지만 기쁘기도 하고!